백년전쟁이 일어난이유
잉글랜드는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는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 봉건 제도의 특징상,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의 봉토를 결혼 지참금으로 넘겼기 때문이었다.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역시 애초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의 영주였고,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플랜태저넷 왕가 역시 본래 프랑스의 앙주 백이었다.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노르망디도 당연히 계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왕의 입김은 프랑스 국왕보다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법률상으로는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의 카페왕조의영향력은 현재의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였다.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카페 왕가 출신인 그의 모친이 그를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겪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 공급을 중단하였다.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몰수를 선언하였다.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을 하게된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였다.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영국이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
백년전쟁 결과
카페 왕조가 끊어지고 발르와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영국과의 사이에 백년 전쟁은 1339년부터 1453년 끝이 났다. 전세는 처음 프랑스에 불리하여 15세기 초에 패배할 뻔 하였다. 그 때 농민의 딸 쟌다르크가 신탁을 받았다고 하여 나타나서 사기를 앙양시킨 결과 전세가 역전되었다. 영국군은 칼레 시 만을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모조리 쫓겨나고 말았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영지를 거의 모두 회복하였다. 이로써 양국은 영토가 정리된데다가 민족 의식이 앙양되어 프랑스의 영토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전쟁터가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각종 전염병과 흑사병이 일어났다. 농민 반란 및 내분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국왕들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상비군을 만들고, 이를 위한 세제를 마련함으로써 시민 계급의 지지와 아울러 강력한 군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영국에서는 백년 전쟁 후 왕위 계승 문제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다. 이 내란에서 거의 모든 제후가 랭카스터와 요오크의 두 왕가를 중심으로 갈라져서 싸운 결과 대부분이 단절되거나 몰락한 자가 많았다. 내란의 종결과 더불어 왕위에 올라 튜더 왕조를 시작한 헨리 7세(1485~1509)는, 귀족 세력의 약화와 오랜 혼란에 지친 국민의 여망을 딛고 강력한 중앙 징권 체제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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